#불안의 정체 #불안의 본질 #불안의 뿌리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불안한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책임감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봐 그런 것 같아요…”
상담실에서 조심스럽게 꺼낸 이야기다.
과거의 어느 시점, 무기력에 빠져 아무런 연락도 없이 잠적해버렸던 기억.
그 기억은 ‘책임감 없는 사람’, ‘폐를 끼친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되어 계속 나를 따라다닌다.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지는 순간, 불안은 거대한 그림자처럼 나를 집어삼킨다.
그런데 상담사 선생님의 한마디가 정곡을 찔렀다.
“불안의 진짜 원인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두려움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나는 책임감 없는 행동을 했고, 폐를 끼쳤다’고 생각하기 때문 아닐까요?”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 그동안 애써 외면하고 감춰왔던, 내면 깊숙한 곳의 자기비난 목소리를 정면으로 마주한 순간이었다.
사실 나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나는 부족한 사람’이라고 단죄하는 내 안의 시선이었던 것이다.
오래된 길 vs 새로운 길: 왜 자책을 멈추기 어려운가
이 사실을 깨달았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바뀌지는 않는다.
상담사 선생님은 ‘자기 이해’와 ‘자기 공감’을 통해 스스로의 변호인이 되어주라고 조언하셨다.
“나는 그 당시에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어”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주는 연습을 하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 새로운 문장은 너무나 낯설고 어색하다.
한두 번 되뇌어 봐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아니야, 그래도 내가 잘못한 거야”라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다.
‘나는 잘못했어. 나는 부족해.’라는 생각은, 수십 년 동안 매일같이 걸어 다녀 아주 단단하고 넓게 닦인 ‘오래된 길’과 같다.
너무나 익숙해서 눈을 감고도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반면에 “아니야, 그건 어쩔 수 없었어.”라는 새로운 생각은, 방금 숲속에 처음으로 내디딘 ‘새로운 길’과 같다.
아직 길도 제대로 나지 않은, 낯설고 풀이 무성한 곳이다.
우리의 마음과 뇌는 자연스럽게 익숙하고 편안한 ‘오래된 길’로 돌아가려 한다. ‘아직 내가 잘못한 것 같아’라고 느끼는 것은, 의지나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뇌의 아주 자연스러운 습관 때문이다.
우리의 목표는 하루아침에 낡은 길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낯설고 어색하더라도 ‘새로운 길’로 한 걸음, 또 한 걸음 걸어가며 그 길을 조금씩 다져나가는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는 새로운 길을 다지는 두 가지 관점
그렇다면 어떻게 이 낯선 길을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 수 있을까? 여기, 마음에 선물할 수 있는 두 가지 새로운 관점이 있다.
1. ‘의지’의 문제가 아닌, ‘에너지’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당시 ‘급격한 우울감’에 빠져 있었다. 이것은 ‘기분이 좀 안 좋다’는 차원이 아니다.
핸드폰 배터리가 1% 남았을 때를 상상해보자.
메시지를 보내거나, 전화를 걸거나, 인터넷을 켜는 아주 기본적인 기능조차 작동하지 않는다.
억지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그냥 전원이 꺼져버린다. 이것은 핸드폰의 ‘의지’나 ‘책임감’의 문제가 아니라, 작동할 물리적 에너지가 ‘0’에 가깝다는 객관적인 사실이다.
그때의 마음과 뇌가 바로 그 방전된 핸드폰과 같았다.
누군가에게 연락을 하고,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마주하는 것은 기본적인 일이지만 그때는 그 일을 수행할 최소한의 에너지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방전된 기계에게 “왜 작동하지 않니? 책임감이 부족하구나!” 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스스로에게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에너지의 문제였다.
2. 가장 소중한 친구에게 하듯, 나를 대하기
이번에는 잠시 역할을 바꿔보자.
만약 가장 소중한 친구가 자신과 똑같은 상황에 처했다고 상상해보자.
그 친구가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한다.
“너무 아파서… 회사에 연락도 못 하고 나가지도 못했어. 결국 그만두게 됐어. 내가 모든 걸 망친 것 같아. 나는 정말 책임감 없는 사람이야…”
그 친구에게 뭐라고 말해주겠는가?
“그래, 네 의지가 부족했네. 책임감이 없어서 그런 거야” 라고 똑같이 비난할 것인가?
아마 아닐 것이다.
따뜻하게 안아주며 “아니야,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겠어. 아파서 그런 건 네 잘못이 아니야. 어쩔 수 없었던 거야.”라고 말해줄 것이다.
우리는 타인에게는 이토록 관대하고 따뜻한 위로를 건네면서,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잣대를 들이댄다.
자신이 소중한 사람에게 건넬 그 따뜻한 위로와 이해의 말을, 지금 자기 자신에게도 해줄 자격이 충분히 있다.

불안과 자책의 ‘오래된 길’이 다시 유혹할 때마다, 이 두 가지 관점을 떠올려보자.
‘나는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나는 아파서 에너지가 없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는 새로운 길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연습을 해보는 것이다.
그 길은 처음에는 낯설겠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수록 점점 더 단단해져, 언젠가는 자신을 지켜주는 가장 튼튼한 길이 되어줄 것이다.
관련 글 읽기
자기부정의 늪에서 나를 구하는 법 (feat. 헤르만 헤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