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부정과 죄악감은 개인의 영혼을 잠식하는 깊은 늪과 같다.
그 안에서 이뤄지는 허우적임은 벗어나려는 발버둥이라기보다 스스로를 더욱 깊은 곳으로 끌어내리는 무력한 몸짓에 가깝다.
이러한 고통의 원형을 우리는 위대한 문호 헤르만 헤세의 삶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청년 시절 자살의 위기와 동거했던 그의 삶은 고통을 극복한 승리의 기록이 아닌, 죽음으로부터 간신히 살아남은 처절한 투쟁의 역사였다.
부모의 기대라는 무거운 옷
헤세의 고통은 ‘부모의 기대’라는 견고한 틀에서 시작되었다.
성직자가 되기를 바랐던 부모의 신념과 가치관은 그에게는 맞지 않는 옷과 같았다.
아무리 훌륭한 가치관이라 할지라도, 자기 선택이 아닌 것은 결국 인생의 장애물이 될 뿐이다.
부모가 지어준 옷을 벗어 던지지 않고서는 자신이 본래 원하는 삶을 결코 입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정받고 싶다’, ‘사랑받고 싶다’는 자식의 순수한 바람은 역설적으로 자신을 구속하는 족쇄가 되어 마음을 질식시킨다.
파괴를 통한 창조, 실패라는 이름의 구원
그가 보였던 신학교에서의 이탈과 방탕한 생활은 단순한 타락이나 실패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으로 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으며, 부모가 부여한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필사적인 저항이었다.
진정한 자신으로 태어나기 위해, 때로는 과거의 자신을 파괴하고 죽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의 모든 좌절과 실패는 결과적으로 자기 인생의 권리를 되찾는 과정이었으며, 원하는 삶을 살 수 없다면 이는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이라는 절규였다.

안식처인가, 위험한 감옥인가
이처럼 모든 것을 내던지는 투쟁의 과정 속에서, 인간의 마음은 본능적으로 하나의 안식처를 갈망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온전히 받아주는 버팀목, ‘안전기지’이다.
안전기지란 필요할 때 기댈 수 있다는 믿음을 주면서도 상대를 구속하지 않고, 자유로운 탐색을 지지해주는 존재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안전기지는 쉽게 그 본질을 잃고 ‘위험기지’로 변질될 수 있다.
선의라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과도한 조언과 지도는 행동을 구속하고, 관계에 대한 정서적 대가를 요구하거나 상대를 지배하려 드는 순간, 그곳은 더 이상 안식처가 아닌 위협적인 공간이 되어버린다.
소유가 아닌 공감, 서로를 구원하는 관계의 조건
이 둘을 가르는 핵심적인 차이는 관계를 대하는 근본적인 태도에서 비롯된다.
바로 ‘소유’가 아닌 ‘공감’의 관점이다.
소유는 상대를 자신의 일부로 여기고 통제하려는 태도이며, 이는 안전기지를 파괴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반면 공감은 상대의 자립과 의사를 존중하는 대등한 관계를 전제로 하기에, 그 안에는 강요 없는 안심감과 편안함이 깃든다.
결론적으로 진정한 안전기지를 원한다면, 나 자신이 먼저 상대에게 안전기지가 되어주어야만 한다.
일방적인 의존이 아닌 상호 존중과 공감의 관계 속에서만 서로는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다.
자기부정과 죄악감에 시달리고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시간이다.
나는 원치 않는 옷을 입고 있는지, 나에게 기댈 수 있는 안전기지는 있는지, 그리고 나는 타인에게 소유를 강요하는지 혹은 공감으로 다가서는지를 말이다.
과거의 자신과 결별하고 공감의 관계를 맺어 나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신을 옭아맨 고통에서 벗어나 진정한 나의 삶을 시작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이유, 오카다 다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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