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속여야만 이길 수 있는 싸움, 우울증

자신의 의식과 씨름하는 일은 지독히 힘겹다.

이 내면의 싸움에서 우리가 가진 무기는 우리를 공격하는 바로 그 의식 자체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끝없는 싸움의 파장은 필연적으로 관계의 영역까지 번지며, 삶의 모든 것을 뒤흔든다.

생존을 위한 의식적 기만

우선 싸움은 생각의 전장에서 시작된다.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확신, 삶이 무의미하다는 감각이 영혼을 잠식할 때, 의식적으로 행복했던 시절의 추억을, 아름다운 생각들을 꺼내 드는 것은 생존을 위한 처절한 저항이다.

부정적으로 흐르는 생각의 물길을 억지로 트는 이 행위는 어떤 면에서 보면 거짓이고 자기기만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기만이 절망의 늪에서 우리를 건져 올리는 유일한 동아줄이 되기도 한다.

스스로 구멍 내는 구명보트의 역설

내면의 전장에서 벌어지는 이 혼란은 가장 비극적인 모순을 낳는다.

타인의 사랑과 도움이 가장 절실할 때, 오히려 그것을 파괴하는 행동을 유발하는 것이다.

이는 망망대해에서 자신이 탄 구명보트에 스스로 핀을 찌르는 행위와 같다.

도움의 손길을 밀어내고 고립을 자초하는 이 역설은 병이 만들어내는 환각이다.

이 자기 파괴의 연쇄를 끊어내는 것은 외부의 개입, 즉 ‘치료’의 역할이다.

고통의 본질을 되찾아주는 벽

특히 약물치료는 나와 우울증 사이에 견고한 벽을 세워, 이성적인 싸움이 가능한 거리를 확보해준다.

약에 의존하게 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 벽이 없었다면 나는 잠식당했을 것이다.

항우울제는 고통을 소멸시키는 마법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이유 없는 거대한 슬픔 대신, 더 중요하고 의미 있는 순간에, 더 그럴듯한 이유로 고통받을 수 있도록 돕는다.

병적인 고통을 걷어내고 삶의 당연한 고통을 감당할 힘을 주는 것이다.

연민이 아닌, 수고가 유일한 치료법이다

결국 이 모든 행위—부정적 사고와 싸우는 의식적 노력, 사랑을 밀어내려는 본능과의 사투, 약과 치료의 도움을 구하는 용기—가 바로 샬럿 브론테가 말한 ‘수고’의 본질이다.

중증 우울증은 맨몸으로 싸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약물치료를 거부하는 것은 현대 전투에 말을 타고 나서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도움을 구하는 것은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가장 용기 있는 싸움의 방식이다.

저절로 낫기를 기다리는 것은 방치에 가깝다.

“연민이 아니라 수고가 치료법이다. 수고는 뿌리 깊은 슬픔의 유일한 근본적 치료법이다.”

그것이 완벽한 해답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가야만 하는 유일한 길이다.

(참고문헌 – 한낮의 우울, 앤드루 솔로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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