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피와 우울의 악순환
나의 꿈은 과학자였다.
현미경 속 작은 세계를 관찰하고, 복잡한 데이터 안에서 규칙을 찾아내는 일에 흥미를 느꼈다.
연구실은 그런 내게 세상의 원리를 탐구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실력 있는 과학자로 거듭나기 위한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풀리지 않는 문제 앞에서 좌절도 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연구실 책상 앞을 지켰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 글은 순수했던 열정이 어떻게 스스로를 옭아매는 덫이 되었는지, 그리고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던 그날, 나의 회피가 어떻게 끝없는 악순환의 시작이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연구실이 시험대가 되다
처음에는 연구 그 자체가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인정받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내면에서 자라났다.
‘과정’의 즐거움은 희미해지고, ‘결과’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연구 노트는 더 이상 호기심의 기록이 아닌, 나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보고서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성과에 몰입할수록 성과는 더 나지 않았다.
즐거움 없이 쥐어짜는 아이디어는 힘이 없었고, 실패한 데이터는 그대로 나의 무능을 증명하는 낙인이 되어 심장을 찔렀다.
사랑했던 연구는, 이제 피하고 싶은 숙제가 되어버렸다.
열정은 그렇게 서서히, 나를 태우는 독이 되고 있었다.
세상의 색이 사라진 날
결국, 버티고 있던 마음의 둑이 터지는 날이 왔다.
여느 때처럼 논문을 펼쳤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눈앞에 있는 글자들이,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단어들은 의미를 잃고 해체되어 검은 기호의 나열로 흩어졌다.
그것은 거대한 우울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날 이후, 나의 세상은 색을 잃었다.
모든 것이 흑백 필터를 씌운 영화처럼 느껴졌고, 즐거움이나 슬픔 같은 뚜렷한 감정 대신, 정체 모를 무거움만이 온몸을 짓눌렀다.
침대는 중력이 몇 배는 더 강해진 듯 나를 놓아주지 않았고, 방 안의 공기는 끈적한 늪처럼 느껴져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세상의 시간은 분명 흘러가고 있는데, 오직 나의 시간만이 멈춰버린 섬에 갇힌 기분이었다.
전화벨이 울려도 받을 수 없었다.
화면에 뜨는 발신자의 이름이, 나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세상의 요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불 꺼진 방 안에서, 살아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했다.
그 상태로 랩미팅에 갈 수는 없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너무나 무서워졌다. 텅 빈 눈으로 앉아있을 나의 모습, 그들의 눈빛이 나의 무능을 꿰뚫어 볼 것만 같은 공포.
결국 나는 사람들을 피해 숨었다.
끝없는 뫼비우스의 띠
며칠을 앓은 뒤, 간신히 쥐어짠 용기로 교수님을 찾아갔다.
더는 못하겠다고, 잠시 쉬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그 ‘잠시 멈춤’이 나를 살릴 동아줄이라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내 삶은 벗어날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 위에 갇히고 말았다.
[열정의 변질(압박)] → [우울 에피소드(세상의 변색, 독서 불능)] → [첫 회피(랩미팅 불참)] → [공식적 회피(휴식 결정)] → [죄책감, 우울 심화] → [더 큰 회피(대인기피)] → [완전한 고립] → …
뫼비우스의 띠 위에 갇힌다는 것은 이런 느낌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무언가 해야 한다’는 불안감이 나를 덮쳤다.
하지만 몸은 천근만근이었고, 이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실패자’라는 절망감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 절망감은 다시 나를 침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들었고, 그렇게 의미 없는 또 하루가 지나갔다.
불안, 절망, 무기력. 이 세 가지 감정의 궤도를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공학도’라는 나의 정체성은 산산조각 났다.
그것이 사라진 자리에는 텅 빈 공허함만이 남았다.
거울 속의 나는 낯선 사람이었고, 과거의 나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먼 별처럼 느껴졌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친구에게 연락해야 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그 ‘해야 한다’는 생각은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에너지가 없었다. 마치 내 의지와 몸이 완전히 분리된 것 같았다. 이 무력감이야말로 가장 큰 절망이었다.
회피는 우울을 낳고, 우울은 더 큰 회피를 불렀다.
어디가 시작인지도 모를 이 고리 안에서, 나는 끝없이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이 긴 터널을 빠져나오기 위한 첫걸음은, 이 모든 과정이 단순히 나의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병적인 악순환의 고리 때문이었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며 나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것이 그 두 번째 걸음이다.
이것은 나의 실패의 기록이 아닌,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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