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EA 비축유 4억 배럴 방출
며칠 전, 국제에너지기구(IEA)에 속한 32개 회원국이 무려 4억 배럴의 비축유를 방출하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뉴스에서는 당장이라도 유가가 안정될 것처럼 보도했지만, 내가 노트에 끄적이며 직접 계산해 본 현실은 조금 달랐다.
투자와 경제를 공부하는 과정은 마치 육아를 하거나 삶의 철학을 세우는 과정과 꽤 닮아 있다.
눈에 보이는 현상 너머의 진짜 의미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유가 이슈를, 일상적인 생각들과 엮어 조금 더 쉽고 편안하게 풀어보고자 한다.
4억 배럴이라는 숫자가 주는 착시 현상
언론에서 강조하는 ‘4억 배럴’이라는 숫자는 듣는 순간 마음을 아주 편안하게 만든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앵커링(닻 내림) 효과’라고 부른다.

처음 들은 엄청난 숫자에 기준점이 박혀버려, 진짜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스케일을 대입해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전 세계가 하루에 펑펑 써대는 원유의 양이 대략 1억 배럴이다.
즉, 4억 배럴이라는 어마어마해 보이는 양도 전 세계가 평소처럼 기름을 쓴다면 고작 ‘4일’ 만에 바닥날 물량이다.
이건 마치 육아를 할 때 마트에서 초대형 기저귀 박스를 사 오며 “당분간 기저귀 걱정은 없겠지!” 하고 안도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갈아입히다 보면 어느새 바닥을 드러내는 것과 똑같다.
투자 세계에서도 이런 거대한 숫자의 마법에 속지 않고, 전체 대비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 차분하게 계산해 보는 습관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위기 상황의 ‘플랜 B’, 그리고 남겨진 빈자리
지금 시장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중동의 핵심 통로인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는 것이다.

이 좁은 바닷길을 통해 하루 2,100만 배럴의 원유가 전 세계로 실려 나간다.
이곳이 막히면 세상이 멈출 것 같지만, 산유국들도 바보는 아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 같은 나라들은 바닷길이 막힐 때를 대비해 파이프라인으로 기름을 돌려보내는 ‘플랜 B’를 꼼꼼하게 마련해 두었다.
이 우회로를 통해 하루 700만 배럴 정도는 어떻게든 밖으로 빼낼 수 있다.
우리가 인생의 위기나 육아의 돌발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기 위해 대안을 준비해 두는 것처럼, 국가 경제도 나름의 회복력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플랜 B가 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2,100만 배럴 중 700만 배럴을 구출해 내더라도, 여전히 하루 1,400만 배럴이라는 엄청난 양이 시장에서 텅 비어버린다.
진짜 문제는 바로 이 채워지지 않는 1,400만 배럴의 구멍에서 시작된다.
거대한 물탱크와 작은 수도꼭지의 딜레마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허탈했던 부분은 인프라의 현실적인 한계였다.
단순하게 계산하면, IEA가 푸는 4억 배럴을 매일 부족해지는 1,400만 배럴로 나누면 약 28일 동안은 버틸 수 있다는 답이 나온다.
한 달 정도 시간을 벌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수학 공식처럼 딱 떨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창고에 기름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도, 그것을 빼내서 배에 싣고 시장에 푸는 시설(인프라)에는 물리적인 한계가 있다.
현재 전 세계가 젖 먹던 힘을 다해 비축유를 뿜어내도 하루에 300만~500만 배럴을 푸는 것이 최대치다.
거대한 물탱크에 물이 가득 차 있어도, 수도꼭지가 작으면 물은 졸졸 흐를 수밖에 없다.
결국, 하루에 1,400만 배럴이 부족한데 우리가 채워 넣을 수 있는 양은 기껏해야 500만 배럴이니, 매일 900만 배럴 이상이 계속 부족해지는 참담한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

해열제 처방
이번 조치로 한국도 약 2,246만 배럴의 비축유를 풀기로 했다.
현재 우리나라 비축량의 약 30%를 헐어내는 쉽지 않은 결정이다.
한국은 기름 한 방울 나지 않으면서도 하루에 290만 배럴을 쓰는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나라다.
특히 이 중 70%가 문제의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들어온다.
사우디가 우회해서 보내주는 물량을 긍정적으로 계산해 봐도, 해협이 막히면 우리나라는 매일 136만 배럴의 기름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러야 한다.
우리가 내놓기로 한 2,246만 배럴로는 이 부족분을 겨우 16일 정도 메울 수 있다.
이것은 아이가 밤에 열이 펄펄 끓을 때 먹이는 ‘해열제’와 같다.
당장 급한 불을 끄고 열을 내리게 해주지만, 몸속의 바이러스 자체를 없애주지는 못한다.
16일이라는 약효가 떨어지기 전에 어떻게든 사태가 해결되기를 기도해야 하는 셈이다.
만약 사태가 길어진다면, 우리는 에너지를 아껴 쓰는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라는 쓴약을 삼켜야 할지도 모른다.
현물과 선물에서 읽어낸 사람들의 마음
원유 시장에는 두 가지 가격이 있다.
하나는 지금 당장 거래되는 ‘두바이유(현물)’ 가격이고, 다른 하나는 한 달 뒤에 받기로 약속하고 미리 사는 ‘WTI(선물)’ 가격이다.
보통은 기름을 보관하는 창고비와 이자가 붙기 때문에, 나중에 받는 선물이 지금 당장 사는 현물보다 비싼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다.
그런데 지금 시장은 이 상식이 완전히 뒤집혀 버렸다.
당장 사고파는 두바이유는 113달러까지 무섭게 치솟았는데, 내년 4월에 받기로 한 WTI 선물은 92달러 선에 머물고 있다.


나중에 받을 물건이 오히려 싼 이 기이한 현상을 경제 용어로는 ‘백워데이션’이라고 부른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당장 내일 전쟁이 나서 기름이 끊길지 모른다는 극심한 ‘공포’ 때문이다.
사막에서 목이 말라 죽어가는 사람은 지금 당장 마실 물 한 모금에 전 재산을 내놓는다.
한 달 뒤에 오아시스에 도착해서 마실 물은 지금 당장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113달러라는 가격은 시장의 극단적인 공포가 만들어낸 패닉 바잉의 결과다.
하지만 동시에, 87달러라는 선물 가격은 시장의 ‘차가운 이성’을 보여준다.
수많은 투자자의 돈과 머리가 모인 시장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무서워서 프리미엄을 주고 사지만, 이 전쟁과 혼란이 아무리 길어도 한 달 뒤에는 어떤 식으로든 끝이 나거나 잠잠해질 것이다.”
공포에 떨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성적으로 상황의 끝을 예측하는 인간의 심리가 숫자 두 개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정리하며
IEA의 4억 배럴 방출은 결코 세상을 구원할 마법의 지팡이가 아니었다.
겉으로 보이는 숫자는 화려했지만, 하루에 풀어낼 수 있는 양의 한계와 실질적인 부족분을 계산해 보면 여전히 시장은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다.
‘사상최대’ 비축유 방출, 이란의 위협 못이겨…유가 100달러 재돌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