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진 길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대학에 가면 성공적인 삶이 펼쳐진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이 말을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하나의 정답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고, 나는 그 정해진 길 위를 그저 앞만 보고 달렸다.
나에게 그 길은 ‘공부’라는 단 하나의 길이었다.
공부는 세상의 전부였고, 내가 가장 잘하는 유일한 것이었으며, 나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희미했지만, 일단 달리면 된다고, 그러면 모든 것이 괜찮을 것이라고 막연히 믿었다.
하지만 어느 날, 나는 그 익숙한 길 위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대학원을 그만두고, 아이를 품에 안고, ‘부모’라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들어섰다.
이상하게도, 나는 더 이상 그 예전의 길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논문과 씨름하던 밤들, 다음 학기를 계획하던 치열함이 이제는 아득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분명 내가 스스로 선택한 멈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을 채우는 것은 해방감이 아니라 깊고 막연한 불안이라는 사실이다.
주변 친구들은 하나둘씩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명함을 갖고 사회의 일원으로 제 몫을 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나는 집이라는 공간에 멈춰 서서 세상의 속도로부터 서서히 뒤쳐지고 있는 것만 같다.
밤새 아이를 돌보고 난 뒤 새벽녘, 희미하게 동이 터오는 창밖을 보며 문득 공포감이 밀려온다.
‘내가 할 줄 아는 것은 정말 공부밖에 없었는데, 이제 나는 무엇으로 나를 증명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이 글은 과거의 내가 평생 공들여 쌓아 올린 세계가 무너졌다고 느끼는 이들, 정해진 길 밖에서 방향을 잃고 서성이는 이들을 위한, 그리고 바로 오늘의 나를 위한 솔직한 기록이다.
나를 지탱하던 세계의 붕괴
‘모범생’이라는 정체성은 아주 오랫동안 나를 지탱해 온 단단하고 유일한 기둥이었다.
모든 것이 예측 가능했던 내 세상에서, 시험 점수와 빼곡히 채워진 성적표는 나의 가치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지표였다.
더 높은 학위는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하는 보증수표처럼 보였다.
그 세계 안에서는 모든 것이 놀라울 정도로 명확했다.
노력은 시간을 배신하지 않았고, 정해진 커리큘럼이라는 지도를 따라가기만 하면 어김없이 다음 단계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불확실성이 주는 불안을 견디지 못했던 나에게, 그 예측 가능한 세계는 얼마나 안전했던가.
하지만 그 세계 밖으로 나온 순간, 세상의 모든 규칙이 뒤바뀌었다.
아이의 울음에는 정해진 답이 없었고, 갑자기 열이 오를 때면 내가 배운 어떤 지식도 소용없었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더 이상 그 치열했던 학문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내 마음의 소리를 인정한 순간, 나는 내가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정체성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안도감과 함께 공포감을 가져왔다.
끝없는 압박감과 성취 증명의 굴레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
하지만 동시에, 그 익숙한 길을 버리고 나니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된 데서 오는 공포감.
‘공부’라는 가장 익숙하고 확실했던 도구를 손에서 놓아버리니, 나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낯선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다.

뒤쳐지고 있다는 공포
이 불안감은 잠든 아이의 숨소리만이 들리는 고요한 밤, 무심코 집어 든 휴대폰을 열어볼 때마다 더 선명해진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올릴 때마다 나타나는 동기들의 취업 소식, 반짝이는 사원증을 목에 건 모습, 고된 회사 생활에 대한 유쾌한 푸념들.
머리로는 진심으로 축하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 모든 것이 가슴을 콕콕 쑤시는 작은 바늘처럼 느껴진다.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나만 홀로 시간이 멈춘 공간에 정체되어 과거에 갇혀버린 느낌.
친구가 “너는 요즘 뭐해?”라고 무심코 던진 질문에, 나는 “그냥 애기 보지 뭐.”라고 대답하며 애써 웃어 보이지만, 그 뒤에 숨겨진 수많은 감정의 소용돌이를 차마 설명할 수가 없다.
‘경력 단절’이라는, 이전에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을 것이라 여겼던 네 글자가 이제는 나를 정의하는 꼬리표처럼 무겁게 느껴진다.
그들의 세계와 나의 세계 사이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이 생긴 것만 같다.
그들은 성과와 연봉과 승진을 이야기하는데, 나는 이유식과 기저귀와 예방접종을 이야기한다.
어느 쪽이 더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알면서도, 나는 자꾸만 초라해진다.
내가 쌓아온 모든 지식과 경험이 이 작은 집 안에서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 나는 깊은 무력감에 빠져든다.
내가 공들여 쌓아왔던 것들이 무너진 그 자리에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그저 망연히 서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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