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인생을 역순으로 시작한다.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우리는 생존하는 법을 배운다.
먹고, 입고, 쉬고, 적당한 직업을 갖는 법.
심지어 세상 속에서 우리의 위치가 어디이며, 매일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거대한 믿음 체계(종교, 도덕 등)와도 익숙해진다.
하지만 하루가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일 년이 되면서, 삶의 여정이 중반쯤에 다다랐을 때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한다.
정말 신은 존재하는가? 왜 우주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보일까?
어차피 우리 모두가 거대한 실존적 희극 속에서 분장 놀이를 하는 먼지에 불과하다면, 왜 아름다운 소셜 미디어 피드를 꾸미기 위해 애써야 하는가?
사회에서 필수 과목처럼 여겨지는 어려운 대수학이나 분자생물학, 세계사를 배우기 전에, 어쩌면 우리는 ‘실존적 허무주의(Existential Nihilism)’에 대해 먼저 배워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 글에서는 삶에 내재된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이 철학이 무엇이며, 왜 우리가 이것을 이해해야만 하는지, 그리고 이 공허함 속에서 어떻게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지를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실존적 허무주의란 무엇인가? – 우주적 농담 앞에 선 인간
실존적 허무주의는 한마디로 삶과 우주 전체에 내재된 의미나 목적이 없다는 믿음이다.
이는 인간의 존재에 어떠한 객관적이거나 궁극적인 중요성도 없으며, 의미를 찾으려는 모든 시도 자체가 결국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텅 빈 공허이자, 당신의 존재에 어떠한 목적도 없다고 선언하는 무(無)의 블랙홀과 같다.
이 개념은 역사 속 수많은 현자들의 격렬한 토론 주제였다.
쇼펜하우어, 키르케고르, 사르트르와 같은 철학자들이 이와 관련하여 자주 언급되지만, 이 개념의 중심에는 단연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가 있다.
니체는 우리의 실존을 “의미나 목표도 없이… 가장 끔찍한 형태로 존재에 노출된” 위기 상황으로 진단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노력해야 하는가?
우리의 존재에 진정한 목적이 없다면, 왜 지금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애써야 하는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삶이 살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적인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다른 모든 질문은 그로부터 파생된다.”

왜 우리는 허무주의를 터부시하는가? – 의미라는 질서
이토록 중요한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왜 실존적 허무주의는 주류 미디어는 물론 우리의 교육 과정에서도 거의 언급되지 않는가?
그 이유는 ‘의미’가 가진 사회적 기능에서 찾을 수 있다.
인류의 초기, 생존이 유일한 목표였던 시절에는 삶의 의미를 고찰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문명이 발전하고 과학이 자연 현상을 설명하기 시작하면서, 종교가 제공하던 신성한 질서는 힘을 잃기 시작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외친 것은, 하늘에 있는 신의 문자 그대로의 죽음이 아니라, 서구 사회를 지탱하던 기독교적 도덕과 가치 체계, 즉 ‘절대적인 의미’의 기반이 붕괴하고 있음을 선언한 것이었다.
이론적으로, 삶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사회적으로 장려하지 않는 것은 타당하다.
어린 아이에게 “얘야, 사는 데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단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
아마도 사회는 순식간에 혼란의 도가니에 빠질 것이다.
대중 종교와 사회적 규범은 본질적으로 이러한 혼란을 막고, 사람들의 창의성과 에너지를 ‘공동선’이라는 목표 아래 채널링하기 위해 탄생한 거대한 의미 부여 시스템이다.
실존적 허무주의는 이러한 시스템의 근간을 흔들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터부시되는 것이다.
허무주의를 이해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실존적 허무주의는 표면적으로 가장 우울한 철학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심연을 들여다보면, 역설적으로 가장 낙관적인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우리의 ‘출생 패키지’에는 무엇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목적 지도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모든 것은 우리 스스로 설정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실존적 허무주의를 이해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만약 당신이 스스로에게 무엇이 의미 있고 중요한지를 결정하지 않는다면, 다른 누군가가 당신을 위해 그것을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 우리의 삶은 이미 사회가 ‘가치 있다’고 규정한 것들(명예, 돈, 물질적 소유 등)에 의해 깊숙이 영향을 받고 있다.
실존적 허무주의는 이러한 사회적 가치 추구에 도전하며, 그 어떤 것도 본질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 깨달음의 과정은 다음과 같은 3단계의 정신적 진화를 거친다.
수용: 사회나 타인이 진실의 원천이라고 믿는 단계.
불안: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겪는 극심한 불안과 혼란의 단계.
낙관: 마침내 자신만의 의미를 창조할 기회를 발견하고 희망을 느끼는 단계.

절망에서 희망으로: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3단계
실존적 허무주의와 관련된 진짜 문제는 “우주의 목적은 무엇인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없다’)에서 오는 우울한 생각을 극복하는 것이다.
다음의 3단계는 이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길잡이가 될 수 있다.
1단계: 삶의 무의미함을 온전히 수용하라
정해진 의미나 운명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당신의 사고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사회나 종교적 전통의 규칙과 제약에 대해 걱정하는 대신,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목적을 정의하고 따라야 할 방향을 스스로 설정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실존적 허무주의는 우리 삶의 주도권을 되찾게 하는 자유의 원천이 된다.
2단계: 지적인 탐험을 시작하라
목적이 없다는 자유는 때로 압도적일 수 있다.
“좋아, 의미는 없어. 이제 뭘 원하지? 어떤 길을 가야 하지?”라는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두 번째 단계는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시도하는 끊임없는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철학자들의 깊은 사색에 당신의 뇌를 맡겨보라.
이러한 지적인 여정은 당신이 어떤 방향으로 노력을 집중해야 할지 결정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실존적 안개를 헤쳐나가며 당신의 영혼에 불을 지피는 것을 추구할 의미를 찾게 해준다.
3단계: 온전한 책임감을 받아들여라
당신이 더 이상 특정 이데올로기나 믿음 체계에 묶여 있지 않다는 것은, 당신의 삶을 더 낫게 만드는 것이 온전히 ‘당신의’ 책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임감의 무게에 짓눌릴 수 있다.
이전에는 소셜 미디어 팔로워 수가 행복의 척도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깨달은 후에는, 무엇이 행복을 가져다주는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사실에 압도될 수 있다.
하지만 삶에 내재된 목적이 없다는 것을 직시할 때, 우리는 절망에 굴복하거나, 혹은 삶의 주도권을 잡고 우리 자신의 의미를 창조할 자유를 받아들이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후자는 분명 많은 노력을 요구하지만, 우리 자신의 의미를 창조해야 할 책임감은 심오하고 즐거운 탐구가 될 수 있다.
결론: 공허함 속에서 피어나는 진짜 삶
실존적 허무주의는 삶이 무의미하다고 정의한다.
반면에, 감정을 가진 우리는 어떤 종류의 더 높은 목적 없이는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
철학자들은 이 내적 투쟁을 ‘우리가 가치 있게 여기고 싶어 하는 것과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 사이의 불균형’이라고 부른다.
그렇다, 세상은 우리가 원하는 것과 다르게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정의된 목적의 부재는,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책임감’을 부여한다.
현실을 우리의 개인적인 욕구와 더 잘 조화시키려는 추진력 말이다.
실존적 허무주의는 삶의 종착역이 아니라, 비로소 ‘나의 삶’을 시작하게 만드는 진정한 출발점이다.
(참고 문헌 – What is Existential Nihilism and How to Navigate The Cosmic Void, Ivaylo Durmon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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