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아빠의 멘탈 관리 (feat. 실존적 허무주의)

#실존적 허무주의 #백수 아빠의 멘탈 관리

평범한 평일의 아침, 창밖으로는 사람들이 각자의 직장을 향해 바쁘게 걸음을 재촉하는 풍경이 펼쳐진다.

고요한 집안에는 아이의 새근거리는 숨소리만이 은은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겉보기에는 한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이 일상의 풍경 이면에는, 사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거대한 불안이 시한폭탄처럼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현재 나는 소속된 직장이 없는 이른바 ‘백수’이자 주양육자로서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매달 통장에 꽂히던 안정적인 월급이라는 마취제가 사라진 지금, 과연 내가 앞으로 이 가족의 생계를 무사히 책임질 수 있을지, 좋은 아빠이자 든든한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을지 뼛속 깊은 두려움이 밀려오곤 한다.

소속이 없다는 고립감과 채워지지 않는 통장 잔고를 지켜봐야 하는 초조함은 사람의 자존감을 순식간에 갉아먹기 마련이다.

당장 내일의 생존이 불투명하게 느껴지는 이 척박한 현실 속에서, ‘우주적 관점에서는 삶에 아무런 절대적 의미가 없다’는 실존적 허무주의를 논하는 것은 어쩌면 배부른 소리나 현실 도피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벼랑 끝에 선 것 같은 백수 가장의 입장에서, 역설적이게도 이 차가운 철학은 나를 짓누르는 숨 막히는 압박감을 덜어내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만드는 꽤 현실적인 심리적 도구가 되어주는 것 같다.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다면, 나를 괴롭히는 이 거대한 두려움 역시 실체 없는 허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라는 정교한 게임과 궤도 이탈의 두려움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게임판 위에 던져진다.

이 사회는 번듯한 직장, 꾸준한 소득, 우상향하는 자산 그래프를 가진 사람만을 ‘정상적인 어른’ 혹은 ‘책임감 있는 가장’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다.

직장을 잃거나 경제 활동을 잠시 멈춘 남성은 종종 무능력하다는 보이지 않는 낙인과 함께 깊은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가족을 먹여 살리지 못하는 아빠는 존재 가치가 없다는 무언의 폭력적인 메시지가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실존적 허무주의의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면, 이 모든 시스템과 잣대는 결국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이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낸 정교한 허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우주의 거대한 시공간 속에서, 지구라는 작은 행성 표면에 사는 한 인간이 현재 직업이 없다는 사실이 과연 우주가 붕괴할 만한 비극일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가 규정한 ‘성공한 가장’이라는 절대적인 이데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을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명함이 없다는 이유로 나 자신을 실패자로 규정하던 가혹한 자기 학대를 조금은 멈출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백수라는 현재의 상태는 내 인생이 끝났다는 선고가 아니라, 그저 길고 긴 생애 중 아주 잠시 사회적 궤도에서 벗어나 숨을 고르는 하나의 작은 에피소드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여 볼 수 있다.

애초에 우주가 정해놓은 완벽한 궤도라는 것이 없다면, 궤도를 이탈했다는 불안감 역시 굳이 짊어질 필요가 없는 짐일지도 모른다.

주식 차트 앞에서의 고군분투, 그리고 감정적 거리두기

고정적인 현금 흐름이 단절된 상태에서 자산을 관리하고 투자를 이어가는 것은 극도의 심리적 고통을 수반하곤 한다.

남은 자산을 지키고 불려야만 가족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는 절박함은, 종종 시장의 작은 변동성 앞에서도 이성을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요즘 시장 주도 섹터의 사이클이나 거시 경제 지표들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있다.

글로벌 시장의 수급 전망이나 원자재 가격의 변동성, 그리고 이에 따른 기업의 펀더멘털을 분석하는 일은 무척 흥미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짙은 피로감을 동반하는 것 같다.

끝없이 이어지는 차트의 오르내림 하나하나, 혹은 VIX 지수나 RSI 같은 보조지표의 미세한 움직임에 내 가족의 생존이 걸려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극심한 공포나 조급함에 휩쓸려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기 십상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숨 막히는 상황일수록 투자의 세계와 나 사이에 철저한 감정적 거리를 두는 연습이 필요한 것 같다.

주가지수가 춤을 추고 거시 경제의 불안한 지표들이 쏟아질 때, “이 모든 시장의 광기와 요동침 역시 길게 보면 찰나의 숫자 놀음에 불과하다”는 허무주의적 태도를 의식적으로 되새겨 보는 것이다.

시장이 폭락한다고 해서 당장 내일 우리 가족의 우주가 멸망하는 것은 아니다.

완벽한 타이밍을 잡아 엄청난 수익을 내야만 한다는 가장으로서의 강박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시장의 큰 흐름을 냉정하게 읽어낼 수 있는 심리적 여유가 생겨나는 것 아닐까.

투자의 결과가 내 삶의 가치를 증명하는 성적표가 아니라, 그저 불확실한 세상에서 이성적인 판단을 통해 확률을 높여가는 하나의 건조한 과정일 뿐임을 인정하는 태도가 때로는 가장 훌륭한 리스크 관리가 되어주는 것 같다.

존재로서의 책임감 증명

가장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은 ‘내가 과연 가족을 끝까지 잘 책임질 수 있을까’ 하는 근원적인 의문이다.

하지만 ‘책임진다’는 것의 의미를 우리는 너무 좁게, 오직 경제적인 지표로만 한정 지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돈을 벌어오는 것만이 아빠의 유일한 역할이자 존재 이유라고 굳게 믿는다면, 소득이 끊긴 지금의 나는 가족에게 짐만 되는 무가치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우주가 정해준 ‘가장의 역할’ 같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생각하는 책임을 내 상황에 맞게 스스로 재정의해 볼 수 있다. 비록 지금 당장 통장에 넉넉한 돈을 채워 넣지는 못하더라도,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집안을 정돈하고, 아이의 서툰 몸짓 하나하나에 눈을 맞추며 온전한 사랑을 쏟는 것.

그리고 아내가 퇴근 후 짐을 내려놓고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정서적인 안전 기지가 되어주는 것.

이 모든 것들이 훌륭하게 가족을 ‘책임지고’ 있는 의미 있는 행위들 아닐까 싶다.

돈이라는 숫자로 당장 환산되지 않을 뿐, 주양육자로서 가정을 지키고 가족의 일상을 단단하게 받쳐주는 시간은 한 인간의 삶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밀도 높은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경제적 책임이라는 하나의 기둥이 잠시 흔들린다고 해서, 내가 쌓아온 가족과의 연결고리나 아빠로서의 존재 가치가 완전히 무너지는 것은 결코 아님을 매일 스스로에게 상기시켜 본다.

실존적 허무주의 묘사, 백수 아빠의 감정

스스로 부여하는 미시적 의미

미래에 대한 불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때면 생각의 초점을 아주 좁혀 ‘지금 당장의 현재’로 끌어와야만 한다.

실존적 허무주의는 거대한 목표나 보이지 않는 미래의 성과 대신, 당장 내 감각을 깨우는 미시적인 일상에 집중할 수 있는 여백을 마련해 주는 것 같다.

영원한 것은 없고 어차피 모든 것이 사라진다면, 지금 내가 만지고 느끼고 경험하는 이 찰나의 순간만이 유일한 진실에 가깝기 때문이다.

불안감이 목 끝까지 차오를 때면 나는 부엌으로 향하곤 한다.

도마 위에서 채소를 썰며 칼질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찌개의 냄새에 온전히 집중해 본다.

정성껏 준비한 요리를 식탁에 올리고, 그것을 맛있게 먹는 아내의 얼굴에 번지는 미소를 바라볼 때, 나를 짓누르던 거대한 우주적 불안은 어느새 씻은 듯이 사라져 있음을 느낀다.

또한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 조용히 심리학 책을 펼쳐 들고 인간 내면의 복잡한 감정들이나 불안의 근원을 이해해 나가는 시간 역시 백수라는 꼬리표가 주는 무력감을 잊게 해주는 훌륭한 도피처이자 배움의 장이 된다.

이러한 일상의 작은 조각들은 누가 억지로 시킨 것도, 세상이 대단하다고 박수 쳐주는 위대한 업적도 아니다.

하지만 텅 빈 우주 속에서 내가 오롯이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하고 기꺼이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나만의 의미들이다.

거창한 사회적 타이틀이나 빛나는 명함이 없어도, 이 작고 확실한 기쁨들이 나의 하루하루를 촘촘하게 채워준다면 그것만으로도 꽤 괜찮은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

막막한 백지의 시간을 나만의 색으로 채울 자유

현재의 백수 생활은 끝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터널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당장 내일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차가운 현실 앞에서 철학자의 얼굴을 하고 초연해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막막함이 밀려올 때면 눈을 감고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그리고 우리의 존재가 얼마나 작고 유한한지 잠시 상상해 보는 것은 꽤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내가 짊어진 이 막중한 책임감과 두려움 역시, 억겁의 우주 시간 속에서는 찰나의 순간 피어올랐다 사라지는 작은 먼지와 같을지도 모른다.

이 거대한 무의미함은 절망의 끝이 아니라,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완전한 자유의 시작점을 의미하기도 한다.

내 삶의 가치를 직업의 유무나 투자 수익률로만 증명해야 한다는 억압적인 강박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진짜 삶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다.

지금 이 시간은 실패와 도태의 기록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의 밑바닥을 마주하고 가족과의 관계를 더욱 단단하게 정립해 나가는 소중한 여백이다.

투자 지표가 엇갈리고 불안이 밀려올 때마다 깊게 심호흡을 하고, 내 곁에서 곤히 잠든 아이의 따뜻한 체온을 느껴본다.

거대한 우주의 허무 속에서도, 지금 내 품에 안긴 이 작은 우주를 지켜내는 것.

그것만으로도 오늘 하루 가장으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나의 존재 가치는 충분히 빛나고 있다고 조용히 믿어본다.

낙관적 허무주의

실존적 허무주의

삶의 의미를 잃었을 때, 니힐리즘이 우리를 구원하는 법